봄철 황사와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면 공기청정기는 선택이 아닌 필수 가전이 됩니다. 하지만 수십만 원에서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공기청정기를 구매하고도, 정작 필터의 성능을 제대로 알지 못해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분들이 광고 문구인 ‘초미세먼지 99.9% 제거’를 믿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99.9%가 필터 자체의 성능인지, 아니면 실제 생활 공간에서의 정화 능력인지는 따져봐야 합니다.
촘촘하지 않은 필터를 사용하면서도 바람만 세게 불어 먼지를 날려버리는 방식인지, 아니면 병원 무균실처럼 완벽하게 걸러주는 방식인지 구별할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헤파(HEPA)라는 용어의 정확한 정의와 등급별 차이를 이해해야 합니다.
1. 헤파(HEPA) 필터의 진실: H13부터가 진짜다
공기청정기의 핵심 부품은 바로 필터입니다. 필터는 입자의 포집 효율에 따라 등급이 나뉘는데, 국제 규격에 따르면 크게 EPA(세미 헤파), HEPA(헤파), ULPA(울파) 등급으로 분류됩니다.
시중에서 저가형 공기청정기에 많이 사용되는 E11 등급과, 고성능 공기청정기의 기준이 되는 H13 등급의 차이는 0.3㎛(마이크로미터) 크기의 초미세먼지를 얼마나 놓치지 않고 잡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등급별 제거 효율 비교표
| 등급 (Grade) | 분류 | 제거 효율 (0.3㎛ 기준) | 투과율 (놓치는 먼지) | 용도 및 특징 |
| E10 | EPA (세미 헤파) | 85% 이상 | 15% | 일반적인 먼지 제거, 저가형 모델 |
| E11 | EPA (세미 헤파) | 95% 이상 | 5% | 보급형 공기청정기, 에어컨 필터 |
| E12 | EPA (세미 헤파) | 99.5% 이상 | 0.5% | 준수한 성능, 가정용으로 많이 쓰임 |
| H13 | HEPA (트루 헤파) | 99.95% ~ 99.97% | 0.05% | 초미세먼지 완벽 차단, 병원/고급형 |
| H14 | HEPA (트루 헤파) | 99.995% 이상 | 0.005% | 반도체 클린룸, 수술실 (가정용으론 과함) |
표에서 보듯이, E11 등급은 100개의 초미세먼지가 들어오면 5개를 놓칩니다. 반면 H13 등급은 10,000개 중 5개만 놓칩니다. 수치상으로는 95%와 99.9%가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실내 공간에 떠다니는 수억 개의 입자를 고려하면 폐로 들어가는 먼지의 양은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따라서 미세먼지에 민감한 영유아나 호흡기 질환자가 있는 가정이라면 반드시 H13 등급 이상의 ‘트루 헤파(True HEPA)’ 필터가 장착된 제품을 선택해야 합니다.
2. 99.9%라는 숫자의 마케팅 함정

그렇다면 왜 E11 등급을 쓰는 제조사들도 ‘99.9% 제거’라고 광고할까요? 여기에는 측정 기준의 꼼수가 있습니다.
보통 필터 효율은 0.3㎛(마이크로미터) 크기의 입자를 기준으로 측정합니다. 이 크기의 입자가 물리적으로 잡기 가장 어렵기 때문입니다.
- 양심적인 표기: “0.3㎛ 입자를 99.97% 제거 (H13 등급)”
- 마케팅적 표기: “2.5㎛ 입자를 99.9% 제거”
즉, 입자가 큰 먼지(2.5㎛)를 기준으로 테스트하면 낮은 등급의 필터도 99.9% 제거율이 나올 수 있습니다.
소비자는 99.9%라는 숫자만 기억하지만, 정작 폐포 깊숙이 침투하는 초미세먼지(0.3㎛ 이하)는 걸러내지 못하고 다시 밖으로 내뿜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구매 전 반드시 ‘제거 효율의 기준 입자 크기’와 ‘공인 인증 등급(H13 등)’을 확인해야 합니다.
3. 필터보다 중요한 건 풍량? CADR의 비밀

좋은 필터만 있으면 끝일까요? 아닙니다. 아무리 H13 필터를 썼어도, 공기를 빨아들이는 모터의 힘이 약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공기청정기의 진짜 성능은 ‘얼마나 깨끗한 공기를, 얼마나 빨리 뿜어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를 나타내는 지표가 바로 CADR(Clean Air Delivery Rate, 청정 공기 공급률)입니다.
CADR 수치가 높을수록 넓은 공간의 공기를 빠르게 정화할 수 있습니다.
- 적정 용량 계산법: 우리 집 거실 평수에 1.3배를 곱한 용량의 제품을 골라야 합니다.
- 예: 거실이 10평(약 33㎡)이라면, 공기청정기 사용 면적은 13평(약 43㎡) 이상인 제품을 써야 미세먼지 농도가 ‘나쁨’일 때도 빠르게 수치를 낮출 수 있습니다. 딱 맞는 용량보다는 넉넉한 용량을 써야 모터 소음도 줄고 정화 속도도 빠릅니다.
4. 필터 관리의 중요성: 세균 배양소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공기청정기는 먼지를 없애는 기계가 아니라, 필터에 먼지를 가두는 기계입니다. 필터에 쌓인 먼지, 머리카락, 반려동물의 털,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과 곰팡이는 시간이 지나면 필터 성능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악취의 원인이 됩니다.
특히 여름철 습기가 찰 때 필터 관리를 안 하면, 필터 내부에서 곰팡이가 증식하여 공기청정기를 틀 때마다 ‘걸레 쉰내’나 ‘시큼한 냄새’가 나게 됩니다. 이때 뿜어져 나오는 바람은 깨끗한 공기가 아니라 곰팡이 포자(Bio-aerosol)가 섞인 오염된 공기일 수 있습니다.
- 헤파 필터 교체 주기: 보통 6개월~1년입니다. 절대 물로 씻으면 안 됩니다. 물이 닿으면 필터 조직이 엉겨 붙고 정전기 기능이 사라져 성능이 0이 됩니다.
- 프리 필터 청소: 겉면에 있는 망사형 프리 필터는 2주에 한 번씩 물로 씻거나 청소기로 먼지를 빨아들여야 헤파 필터의 수명을 늘릴 수 있습니다.
5. 자주 하는 질문(FAQ)
Q1. 요리할 때 공기청정기를 틀어놓으면 더 좋나요?
절대 안 됩니다. 고기나 생선을 구울 때 나오는 기름 섞인 연기(유증기)는 필터에 치명적입니다. 기름 입자가 필터의 미세한 구멍을 코팅하듯 막아버리면, 1년 쓸 필터 수명이 단 며칠 만에 끝날 수도 있습니다. 요리할 때는 반드시 창문을 열거나 주방 후드를 사용해 연기를 밖으로 뺀 뒤, 냄새가 어느 정도 사라지면 창문을 닫고 공기청정기를 트세요.
Q2. H14 등급이 더 좋은 거 아닌가요?
성능만 보면 H14가 더 좋지만, 가정용으로는 추천하지 않습니다. 필터가 너무 촘촘하면 공기가 잘 통하지 않아 모터에 과부하가 걸리고 소음이 커지며 전력 소모도 심합니다. 병원 무균실이 아닌 일반 가정에서는 정화 효율과 풍량의 밸런스가 가장 좋은 H13 등급이면 충분합니다.
Q3. 공기청정기 위치는 어디가 좋은가요?
구석에 두지 마세요. 공기청정기는 오염된 공기를 빨아들이고 깨끗한 공기를 멀리 보내야 합니다. 벽이나 가구에 막혀 있으면 공기 순환이 안 됩니다. 활동 시간이 많은 낮에는 거실 한가운데, 잘 때는 침실 방문 앞이나 침대에서 1m 이상 떨어진 곳(찬 바람이 직접 닿지 않게)에 두는 것이 가장 효율적입니다.
6. 출처
- 한국공기청정협회(KACA): 실내공기청정기 단체표준 인증심사 기준 (CA인증)
- 미국 가전제품제조사협회(AHAM): CADR(청정공기공급률)의 정의 및 측정 방법
- 유럽 표준화 위원회(CEN): 고효율 공기 필터 분류 기준 (EN 1822 표준)
- 환경부: 우리 집 실내 공기질 관리 방법 및 공기청정기 올바른 사용법
- 소비자시민모임: 공기청정기 성능 비교 테스트 결과 보고서